이 글의 내용은 박시백 화백의 <35년>에서 발췌함.
고영희
1849~1916
조선 말기 문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1907년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 대신일 때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될 때 적극적 반대 활동을 벌였으나 1909년 내무대신 임시서리 및 탁지부 대신이 돼서는 한일 장제 병합에 적극
관여했고, 그 대가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와 10만 원의 은사금을 받았다. 이후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권중현
1877~1964
조선 말기 문신, 진일 반민족 행위자.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을사오적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각종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의병을 토벌하고, 친일 단체에 관여하는 등 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다.
1907년 3월 나인영, 오기호 등이 이끄는 오적 암살단에게 습격을 받으나 미수에 그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1910년 10월 국권피탈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뭉이 됐다.
김관현
1876~1948
대한제국 시기의 무관, 친일 반민족 행위자. 1900년 일본 육사를 제11기로 졸업하고 보병 정위로 러일전쟁에
참가해 일제로부터 종군기장과 전공금 1,500원을 받았다. 국권피탈과 함께 수원군수가 됐다. 이후 충남도지사와
함남도지사 등 지방 요직을 거치고 1926년 퇴임과 동시에 칙임참의가 됐으며, 1934년부터 해방까지 여러 차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지냈다.
김성수
1819~1955
기업가, 교육가, 언론인, 친일 반민족 행위자. 호는 인촌.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후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
1917년 교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했다. 1919년 3.1혁명에 참여하고, 10월에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이듬해 <동아일보>를 설립해 사장이 됐다. 1922년 물산장려운동,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는 등 실력
양성운동에 매진했다. 1929년 중앙학원을 설립해 193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으며,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의 여파로 <동아일보>에서는 물러나게 된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 강좌를 이틀 동안 담당하고, 국방헌금을 헌납하는 등 친일 행위에 나섰다. 1938년 국민정신
총동원연맹 발가인으로 참여해 이사가 되었고,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에 선임됐다. 1940년대에는
학도 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많이 써서 발표했다. 해방 후 1945년 미 군정청 한국인 고문단 읜장으로
활동했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됐다. 1949년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을 통합한 민구국민당 창당을 주도했고, 1951년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됐으나 부산 정치 파동에 항의하며 1952년 사표를 던졌다.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
민영린
1872~1932
조선 말기 문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양자이며 순종비인 순명효 황후의 남동생이다. 국권피탈
이후 강제 합병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 12만 원의 은사 공채를 받았다.
1919년 아편 복용으로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작위를 박탈당했다.
박영효
1861~1939
정치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 1872년 2월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해 부마가 됐다. 영혜옹주와는 3개월 만에 사별했지만
조정 요직에 임명됐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 개화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김옥균, 서광범 등과 교유하며 함께
개화당을 형성했다. 1882년 8월 임오군란의 수습을 위해 제3차 수신사로 임명돼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을 둘러보며
일본 정치인들과 접촉했다. 이때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김옥균과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을 맡아 병권을 장악했으나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 정부는 압박하고 일본은 박대하자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얼마 후 다시 일본으로
1888년에는 고종에게 장문의 '개화 상소'를 올려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했고, 1893년에는 도쿄에 친린의숙
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워 유학생들의 교육에 힘썼다. 1894년 2월 조선에서 건너온 이일직 등이 암살을 시도하나 미수에
그쳐 목숨을 건졌다. 같은 해, 동학농민운동에 이어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이 이어지자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해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이 됐다. 이후 조선의 부국강병과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나
1895년 7월 역모를 기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다. 1898년 독립협회와 제휴해 정계 복귀를 기도하지만
오히려 고종이 이를 구실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바람에 실패하고, 1900년 7월에는 심복 이규완 등에 의화군 이강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정변을 지시하나 사전 발각되고 그해 11월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07년 6월 일본의
지원으로 귀국하여 특별사면을 받고 7월에 궁내부대신으로 경계에 복귀하나 고종 강제 퇴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된다. 1909년 6월 단군, 조선 태조, 일본 천황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마카미의 우패 봉안과 의식을 거행하는
친일 단체인 신궁봉경회 총재에 선임되고 국권이 피탈되자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은사금 28만 원을 받고
각종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는 한편 친일 단체에 관여했다. 1921년 4월 중추원 친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5년간 재임
하면서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6년 3월 이완용 후임으로 칙임관 대우 부의장에 임명되어 1939년 타계할
때 까지 연임하면서 매년 3,5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5년 7월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 편수회 고문으로 임명되어
타계할 때까지 재임했다. 1932년 12월에는 조선인으로 첫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돼 1939년 타계할 때까지
재임했다.
박제순
1858~1916
조선 말기 문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1883년 과거에 급제한 뒤 톈진으로 건너가 각종 통상 교섭과 관계된 사무를
보았으며, 1887년 귀국한 뒤 중앙 요직과 지방관을 두루 거쳤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10월 외부대신을 맡아
1905년까지 수차례 외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농상공부대신으로 재임하던 1905년 8월 일본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며 사직했다가 얼마 후 다시 외부대신으로 임명됐다. 러일전쟁 후 일본이 을사조약을 추진하자 참정대신
한규설과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만 결국 일본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11월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지 곤스케와 을사조약
을 채결해 을사오적에 이름을 올렸다. 을사조약 체결 후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친일 내각 수반이 됐고 여러 친일 단체에
관여했다.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친일 내각이 총사퇴할 때 함께 사퇴하는데, 바로 중추원 고문에 임명
되고 1909년 2월 다시 내부대신이 됐으며, 11월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 때 장충단에서 관민 추도회를 주도했다.
1909년 12월에는 내각총리대신 서리에 임명됐다. 1910년 6월 총리대신 서리로 경찰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기유각서를
체결했고, 8월에는 내부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그 대가로 1910년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으며 1911년 1월 은사 공채 10만 원을 받았다. 이후로도 <매일신보>를 통해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등 친일 행각을 벌였다.
신응희
1859~1928
조선 말기 무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했고, 1895년 10월
을미사변 때는 조선인 행동대로 가담했다. 1907년 7월 군대해산을 지휘했고, 1909년 8월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적극 지원했다. 국권피탈 후 여러 지역의 지방 장관직을 역임했고, 특히 1919년 4월 황해도장관으로 있으
면서 3.1혁명 참가자를 탄압하겠다는 경고문을 발표한 후, 3.1혁명 참가자를 색출하는 자제단을 조직했다.
어 담
1881~1934
대한제국 시기 무관, 친일 반민족 행위자. 189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 육군 포병 참위로 임관
됐으며, 1905년 고종의 시종무관이 됐다. 국권이 강탈된 1910년 이후에는 왕실 호위 부대인 조선보병대에서
근무하며 1930년 일본 육군 중장으로까지 승진했고, 1931년 조선보병대가 해산된 뒤에는 중추원 참의가 됐다.
유성준
1860~1934
고위 관료, 친일 반민족 행위자. 유길중의 동생이다. 1921년 조선 총독 자문 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됐다.
윤치호
1866~1945
청지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 1881년 4월 도쿄 게이오의숙에 입학한 유길준, 유정수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도쿄 유학생이 됐다.
중서서원의 알렌과 본넬의 알선, 감리교회의 후원으로 1888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해 11월 테네시 주 밴더빌트대학 신학과
영어 과정에 입학했다. 1895년 2월 귀국한 후에는 의정부 참의에 임명되어 갑오개혁에 동참했고, 1897년 7월에는 독립협회에 가담해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운동을 이끌었다. 1906년 4월에는 장지연, 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추대됐으며,
1908년 9월 안창호 등이 주도하는 평양 대성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21년 2월 일제가 날조한 이른바 105인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돼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 일본 천황의 특사로 석방됐다. 출옥 이후 1916년 4월 YMCA 총무에 선출됐다. 1919년 1월
최남선이 3.1혁명 참여를 권유했으나 침묵으로 거부하고, 7월 친일 단체 경성교풍회 회장에 추대됐다. 1924년 4월에는 일선 융화를
표방하는 동민회에 가입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에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 주최한 시국 대응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
했고 황군 위문금과 국방헌금을 냈다. 이 무렵 '애국경기호' 비행기 구입비도 헌납했다. 12월에는 일본군의 난징 함락을 기념해 조선
신궁에서 거행한 난징함락전첩봉고제 위원장을 맡았고, 1938년 5월에는 일본군의 쉬저우 함락을 기념해 조선군 사령부에 1만 원의
국방헌금을 기탁했으며 기독교계의 친일 협력을 위해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으로 선출된 데이어 7월에는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임되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상무이시가 됐다. 1941년 3월 국민총력 기독교 조선감리회연맹에서 주최한 시국 대응 신도 대회
에서 '내선일체의 완벽'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5월에는 조선 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으며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흥아보국단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 상임위원에 위촉됐다. 1942년 2월,
국방비 5,000원을 종로경찰서에 바치는가 하면 1944년 국민총력운동 조선연맹 고문, 국민동원총진회 고문으로 위촉됐다.
11월에는 중추원 참의들과 학병 독려 연설을 했다.
윤택영
1876~1935
조선 말기 문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1906년 딸이 순종의 둘째 부인으로 간택되고 1907년 황후가 되자 해풍부원군이 됐다.
국권피탈 후인 1910년 10월 후작 작위를 받았고, 1911년 사단법인 조선귀족회 이사를 맡았다. 1920년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다가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1935년 10월 객사했다.
이광수
1892~1950
문학가, 언론인, 친일 반민족 행위자. 호는 춘원. 1903년 동학에 입도해 도쿄와 서울에서 오는 문서를 베끼고 배포하는 일을 했다.
1905년 8월 일진회의 추천으로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7년 일본에서 문일평, 홍명희 등과 소년회를 조직하고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와 논설 등을 발표했다. 1910년 이승훈의 초청으로 정주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1911년 105인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됐다. 1915년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9월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했다. 1919년 1월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하이로 가 신한청년당 조직에 가담했다. 안창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감해 7월 상하이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을, 8월에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았다. 1921년 귀국하여 1922년 <개벽>에 '소년에게'를 연재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었고, 5월에는 <개벽>에 조선 민족의 전면적 개조의 필요성을 촉구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했다. 1923년 동아일보사에 객원으로 입사
하였으나, 1924년 사설 '민족적 경륜'이 물의를 일으켜 퇴사했다. 1926년 안창호의 지시에 따라 수양동우회를 발족시키고, 같은 해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33년 8월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까지 활동했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
등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38년 3월 10일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아 실의에
빠졌으며,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하고, 이후 조선 신궁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선다. 해방 이후 1948년 12월 간행한 <<나의 고백>>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 후,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 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1949년 반민특위의 검거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지만, 이광수는 시종 <<나의 고백>>에서 보인 자세를 견지했다. 1950년 6.25전쟁
으로 납북된 뒤, 같은 해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이기용
1889~1961
친일 반민족 행위자, 고종의 오촌 조카다. 국권피탈 후 왕족으로서 자작 작위를 받았지만 도박 등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채무에
시달렸다. 이후 1930년 11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파산이 선고됐으나 작위는 그대로 유지했다. 1945년 4월 '정치 처우 개선'
으로 직선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다. 해방 후인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검거 돼 재판을 받았다.
이병무
1864~1926
조선 말기 무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1894년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904년 육군 무관학교장이 됐고,
1907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군부대신 서리 시종무관장이 되어 곡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에 적극 협조했다.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승만 - 친일은 아니나 반민족 행위
1875~1965
정치가,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제 1,2,3대 대통령. 1904년 11월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하의 중립론'
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 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활동했던 스티븐슨을
암살한 전명운과 장인환의 재판 통역 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기도 했다.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로 활동 근거지를 옮기고,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을 주장하면서 대립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선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격주의를 주창하며 국제연맹을 구상했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대통력으로 추대했고, 이승만은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그러나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구제연맹 위임통치안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승만이 상하이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
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했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1933년 11월 이승만은 이시정부 국무의원에 선출됐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한국의 대표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두 달이 지난 10월 16일 귀국하여, 10월 23일 독립촉성
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됐다.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쪽만이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하고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단독으로 출마해, 투표 없이 당선됐다.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됐고,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됐다. 1949년 반민특위 활동으로 일본 및 총독부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잘을 밝였고, 농지개혁을 추진, 실시했으며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해 북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자신의 육성을 라디오 방송으로 틀어놓은 채 한강대교를 폭파한 뒤 대전
으로 피신했다. 또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돼 있는 헌법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개헌을 추진했다. 개헌 추친 과정에서 야당이
반대하자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실시했고, 같은 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겼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4.6퍼센트의 지지로 재차 당선됐고,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도록 개정했다. 1956년 5월15일 새로 개정된 헌법에 근거해 대통령 선거를
실시, 56퍼센트의 득표율로 제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는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했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해 무투포 당선됐다. 하지만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발발하자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숨졌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이완용
1858~1926
조선 말기 문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1882년 (고종 19년) 과거에 급제했다. 1887년 주미 공사 박정양을 따라 미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1890년 귀국했다. 이후 친미파로 불리게 됐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박정양 내각과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냈고,
1896년 이범진 등과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고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이 됐다. 한때 독립협회에서도 활동했으나
외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것이 문제가 돼 제명됐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친러파로 몰려 외직을
전전하다가 1901년 한직인 궁내부 특진관으로 돌아온 후, 1905년 학부대신으로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군을
동원,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해 을사조약을 주도했다. 그리고 그 공으로 의정대신이 되고, 1907년 6월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올랐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였고, 순종이 즉위하자 정미칠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사실상 일본에게 넘겨줬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군대해산에 앞장섰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욱일동화장을 받았다. 1909년 12월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의 기습을 받아 칼을 어깨에 맞는 중상을 입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1910년 8월 22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 같은 달 29일 나라를 일제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일제로부터
백작의 작위와 수당 60여 원 및 퇴직금, 1458원 33전 등의 대가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 중주원 부의장 등을
지냈고, 1919년 3.1혁명 때는 독립투쟁을 비난하는 경고문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하는 등 친일 행위에 앞장섰다. 그 대가로 1920년
후작으로 작위가 상승했고, 이후에도 끝까지 친일 반민족 행위를 일삼았다.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고 정치 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용구
1868~1912
종교인, 정치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 1890년 동학에 입교해 손병희 등과 제2대 교주 최시형의 제자가 됐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으나
최시형이 처형된 후 제3대 교주가 된 손병희를 따라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03년 손병희의 뜻에 따라 귀국해 포교 활동을 벌였다.
1904년 9월 동학교도를 규합해 진보회를 조직했고, 12월 송병준의 일진회와 병합해 13도 총회장으로 취임했다. 1905년 11월 5일 을사조약
체결 여론 조성을 위해 송병준과 함께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했고, 12월 22일 일진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9월 천도교에서 그를 포함한 62명을 출교시키자 11월
시천교를 창설해 교주에 올랐다.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가 파견되자 송병준과 함께 고종을 퇴위시키기 위해 시위를 일으켰다.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8월 군대해산이 진행되면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의병 토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1909년 12월에는 '정합방 상주문'을
순종과 이왕용 내각 및 통감부에 제출했다. 1910년 9월 일진회가 해산될 때 강제 병합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해산비
5,000원과 은사금 10만 원을 받았다.
이지용
1870~1928
조선 말기 문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1904년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일의정서에 조인했다. 1905년 11월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을 주도해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 국권피탈 과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1912년 1월 도박죄로 작위를 박탈당했으나 1915년 9월 특하로 감형돼 백작 작위를 회복했다.
임선준
1860~1919
조선 말기 문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1907년 내부대신으로서 정미칠조약을 체결할 때 적극 동조했다. 1908년 탁지부 대신이
되어 일본 소유의 군용지, 철도 용지 등에 면세 혜택을 베풀고, 의병에게 처단당한 자의 유족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했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1919년까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정난교
1864~1944
조선 말기 무관, 친일 반민족 행위자. 1882년 3월 김옥균과 일본에 건너가 1883년 일본 도야마육군학교에 입학했다.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원으로 활약했고,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박영효와 함께 귀국했고,
동학 농민 전쟁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1895년 통정대부 정3품에 올랐다. 국권피탈 후인 1910년 10월 충청남도 참여관이 됐으며,
1927년 6월 조선 총독 자문 기구인 중추원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1941년 4월에는 칙임관 대우 참의가 됐다.
조민희
1859~1931
조선 말기 문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27세에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두루 거쳤고 1901년부터 프랑스 공사, 미국 공사를 지냈다.
국권피탈 후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 5만 원의 은사금을 받았다. 1919년 11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역임했다.
조중응
1860~1919
조선 말기 문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1907년 이완용 내각의 법무대신으로서 의병장과 오적 암살단에게 중형을 내릴 것을 주장했으며,
7월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서고 정미칠조약 체결에 참여해 지탄을 받았다.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조희연
1856~1915
조선 말기 무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개혁을 주도했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의 군부대신이 됐다.
국권피탈 후 한일 병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 총독 자문 기구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나
1915년 채무로 인해 작위 유지가 어렵게 되자 조선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작위를 반납했다.
최남선
1890~1957
문인, 언론인, 사학자, 친일 반민족 행위자. 1919년 3.1혁명 때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2년 8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1936년 6월~
1938년 3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 문화의 당면 과제'를
게제했다. 1937년 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 건설위원회 위원을 맡았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4월 만주로 건너가 <만몽일보>의
고문이 됐다. 1937년부터 여러 언론에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했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을 맡았고, 12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이 됐다. <매일신보>를 통해 1943년 11월 5일 자 '보람 있게 죽자'. 11월 20일 자 '나가자 청년 학도야',
11월 25일 자 '오직 감력할 뿐', 1944년 1월 1일 자 '아시아의 해방', 1945년 3월 7일 자 '승리엔 젊은이의 힘' 등을 기고했으며,
시국 선전용 대중잡지였던 <신시대>에 1943년 '만주 건국의 역사적 유래', 1944년 '성전의 설문'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43년 11월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에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선배 격려단'에 참여했으며, 같은 달 일본의 조선인 가정 방문과 간담회, 강연회 등을
개최했다. 11월 14일과 20일에는 일본 메이지대학 강당에서 열린 반도출신 출정학도 궐기대회에서 학병 지원 관련 연설을 했다.
이 밖에 잡지 <방송지우>에 1994년 3월 '도의는 이긴다', 4월 '신세계 건설의 도화선', 1945년 1월에는 '특공대의 정신으로 성은에
보답합시다' 등의 글을 발표했다. 광복 후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나 곧 보석으로 풀려나고, 5월
공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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